• 최종편집 2024-03-26(화)
 


윤석열 정부가 첫 해를 다 보낸 지금, 대통령이 일을 잘했다고 평가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여론조사 결과를 돌아보자. 취임 직후를 제외하고는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이 40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25퍼센트 아래로 내려가기도 했다. 최근에는 한미정상회담,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 하버드대학교 강연 등 미국 국빈방문 일정에 대한 '친윤' 신문‧방송의 낯 뜨거운 찬양 기사가 며칠 동안 포털 사이트의 메인 뉴스 페이지를 채웠는데도 지지율은 오히려 떨어졌다.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절반 넘는 응답자가 대통령이 업무 수행을 '매우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대통령과 참모들은 여론을 무시한다. 주 69시간 노동제부터 양곡관리법 거부권 행사, 대일 대미 굴종 외교, 탈중국 노선으로 인한 경상수지 적자 폭발까지, 정부 여당이 선택한 정책은 대부분 다수 국민의 뜻에 어긋났다. 익명의 대통령실 관계자를 인용한 어느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은 지지율이 10퍼센트가 되더라도 나라와 국민을 위해 옳은 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고 한다. 총선이 1년 앞인데도 국민의힘은 인기 없는 대통령을 무조건 추종한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럴 때는 '옛 성현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다. 처음 보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다 예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철인왕(哲人王) 윤석열

먼저 고대 그리스 사람 플라톤의 말을 들어보았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고유의 텔로스(목적)가 있다. 국가의 텔로스는 정의(正義)다. 정의를 실현하려면 주권을 철학자에게 맡겨야 한다." 플라톤은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를 정치철학의 중심 문제로 설정하고 '현자(賢者)의 지배' 또는 '철인정치(哲人政治)'를 답으로 내놓았다. 그가 생각했던 정의와 오늘날 우리가 널리 받아들이는 정의가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는 점은 논외로 하자.

플라톤의 '철학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아는 사람이다. 철학자가 권력을 잡으면 '철인왕'이 된다. '철인왕'이 국가를 다스리면 사회적 선을 최대한 실현하고 국가의 정의를 확고히 세울 수 있다. 어리석은 다수가 주권을 행사하면 악과 불의가 생길 뿐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아테네 시민들의 행위를 생각해 보라. 플라톤이 틀렸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은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만 그렇다. 주관적으로는 플라톤의 '철인왕'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선과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 여론조사는 야당과 좌파의 선동과 가짜뉴스에 휘둘리는 대중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지표일 뿐이야. 최대한의 선과 정의를 실현하려면 여론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해. 역사는 내가 옳았음을 증명할 거야."

근거가 있냐고? 약하지만 있긴 있다. 어느 '친윤' 신문의 '친윤' 논설위원이 쓴 애정 넘치는 칼럼이다. 4월 20일 「조선일보」에 나온 <태평로> 칼럼인데, 제목은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진 어떤 이유들'이다. 검색해서 읽어보시기 바란다. 필자는 더 따뜻할 수는 없을 시선으로 윤석열 대통령을 바라본다. 대통령의 참모들과 격의 없이 소통한다는 것을 내놓고 자랑한 그 칼럼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철인왕'에 가깝다. 다음은 칼럼에 나오는 사례다.

(1) 대통령은 양자(陽子, quantum) 관련 정책회의에서 장시간 전문적 물리학 지식을 쏟아냈다.

(2) 대통령은 외교‧안보‧경제‧노동‧연금‧교육개혁 등 모든 분야에서 쉽게 결론을 냈고 정책의 틀을 직접 만들었다.

(3) 대통령은 정치인‧교수‧기업인‧종교인‧기자‧유튜버와 수시로 통화하고 텔레그램으로 소통한다.

(4) 대통령은 1시간 회의에서 59분을 혼자 말한다. 그래서 '59분 대통령'이라는 말이 생겼다.


대단하지 않은가? 그 칼럼을 읽고 반성했다. 나는 손바닥에 '王'자를 쓰고 토론장에 나온 뜻을 옳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대선 승리를 염원하는 무속 행위가 아니었다. 플라톤의 '철인왕'이 되겠다는 정치 철학의 표현이었다. 다시 말한다.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윤석열 대통령은 '철인왕'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하는 모든 행위를 이해할 수 있다. 철인왕에게 토론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국민의 의사 같은 것은 의미가 없다. 고독한 '철인왕'은 모든 것을 '결단'하고 '결단'의 결과는 공표할 따름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정말 플라톤이 말한 '철학자'라면 좋겠다. 그러나 어쩌랴, 그렇다는 증거가 없으니. 나는 그가 선과 정의에 대해 우리 헌법이나 상식과는 무척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는 현자라는 확신을 품고 만사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해 왔다고 본다. 그래서 다음 질문을 떠올린다. '주관적 철인왕'의 폭주를 누가 어떻게 제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미 대답한 사람이 있었다. 20세기의 대표적 자유주의자 카를 포퍼다.

권력의 제한과 분산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유명한 책에서 플라톤을 강력 비판했다. 옳지만 아무 쓸데없는 질문으로 정치철학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포퍼는 말했다. "누가 다스려야 하느냐고? 답은 뻔하다. '가장 선하고 현명한 사람'이다. 거짓말쟁이, 바보, 사기꾼, 선동가, 난폭한 자라고 대답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정치철학은 나쁜 정부가 들어서는 경우를 다루어야 한다. 사악하거나 무능한, 또는 사악하면서 무능한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하려면 정치제도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 이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포퍼는 권력의 제한과 분산을 답으로 제시했다. 아주 말이 되는 주장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권력자를 선출한다. 그런데 보통선거 제도는 플라톤식 '철학자'의 선출을 보장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가장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해 최대한의 선을 행하는 데 적합한 정치제도가 아니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강점은 최악의 인물이 권좌에 올라도 나쁜 짓을 마음껏 저지르지는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자가 헌법과 법률에 따라 통치하게 하는 법치주의, 선출직 공무원의 임기 제한, 언론‧출판‧집회‧시위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 기본권 보장, 삼권분립, 복수정당제를 비롯한 권력의 제한‧분산과 상호견제 덕분에 민주주의는 문명의 표준이 되었다.

어떤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인가? 다수의 국민이 마음먹을 때 합법적이고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으면 민주주의다. 그런 제도가 없거나 사실상 불가능하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악하거나, 무능하거나, 사악한 동시에 무능한 인물이 권력을 차지했다고 해서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고장 난 것은 아니다. 그런 결과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민주주의 정치 게임의 일부다. 민주주의는 그런 상황에서도 위험을 관리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 장치를 보유하고 있다. 그런 장치를 최대한 활용하면 '주관적 철인왕'의 폭주를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다. 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그 일을 어느 정도 잘 해나가는 중이라고 본다.

불행을 줄이는 방법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는 4년'밖에' 남지 않았다. 아무리 더 달리고 싶어도 2027년 5월 9일에는 멈추어야 한다. 게다가 야당이 압도적 다수의석을 가진 국회가 입법권으로 대통령의 폭주를 막고 있다. 야당은 양곡관리법, 간호법, 의료법, 방송법 등을 의결해 국가정책의 방향과 내용을 바꾸려고 한다. 대통령의 친구인 행안부 장관을 탄핵해 이태원 참사에서 드러난 무능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소위 대장동 '50억 클럽 특별법'과 '김건희 특검법'을 신속처리 절차에 올렸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재의를 요구해 입법권을 무력화했던 대통령이 다른 법률안과 특검법안에 대해서도 재의를 요구할 가능성은 있다. 국민의힘은 당론으로 대통령을 지지해 그 모든 입법안을 다 무산시킬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도 입법이 필요한 일은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윤석열 후보에게 표를 주었던 유권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손절'했다. 뽑은 건 되돌릴 수 없으니, 힘을 빼서 못난 짓을 마음껏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바닥을 헤매는 여론조사 국정수행 지지율이 그 증거다. 시민들은 짜증을 참아가며 긴 시간이 걸리는 여론조사에 끝까지 응함으로써 '주관적 철인왕'의 폭주를 저지하고 있다. 이런 여론 덕분에 야당은 적극적으로 입법권을 행사한다. 같은 분위기가 지속되면 판사들이 정치적 논란이 따르는 사건에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하거나 정권의 의도와 다른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다.

'주관적 철인왕'에게 가장 큰 위험은 여당의 '손절'이다. 대통령은 김기현 의원을 당대표로 간택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여당 정치인들은 혹시라도 공천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대통령을 추종하고 있다. 그러나 올 가을 정기국회가 끝날 때까지도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면, 수도권과 충청권 총선 전망이 밝지 않은 가운데 영남을 비롯한 국민의힘 강세 선거구를 친윤 정치지망생이 독식하려고 대들면 대통령을 비난하는 여당 정치인이 생길 것이다. 내년 총선 결과가 매우 좋지 않을 경우 대통령에게 당적 이탈을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검찰총장 직을 이용해 자신을 발탁한 문재인 대통령과 대결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개척했던 윤석열의 전략을 윤석열 대통령이 발탁한 누군가가 그대로 따라 할지도 모른다.

취임 1년을 맞은 대통령을 두고 '손절의 정치학'을 거론하자니 야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가 자초한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무슨 일로도 국민과 소통하지 않았다. 야당 지도자와 단 한 번도 말을 섞지 않았다.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 집권세력 안에서도 복종하지 않는 자는 모두 내쳤다. 일본 총리나 미국 대통령을 만날 때 말고는 언제나 화난 표정으로 사납게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지 못해서인지 지금도 변함없이 화가 나 있다. 카를 포퍼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한국을 봐. 저런 게 바로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강점이라구!"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

태그

BEST 뉴스

전체댓글 0

  • 56674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유시민 관찰] 손절(損切)의 정치학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
-->